무설전(無說殿)을 새로 지어 화엄경(華嚴經)을 여기서 가르쳤다고 하며, 그 후 경덕왕 10년(751년)에 드디어 김대성(金大城)이 크게 개수하면서 오늘날 불국사의 상징물로 알려진 탑과 성교 등을 만들었다고 한다.
(2) 사적에 따른 창건 역사
《불국사 사적》(事蹟)에 따르면, 불국사는 이미 눌지왕(訥
찾아왔는데 이들을 보고 놀란 처녀가 비명을 질러 이곳에 멈춰선 두 신이 그 자리에 각각 망산과 남산이 되었다는 것이 남산과 망산의 전설이다. 또 <아사달과 아사녀 전설>은 이러하다. 백제의 석공 아사달은 불국사다보탑을 완성하고 이어서 석가탑을 만드는 데 여념이 없었다. 그의 아내 아사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ꡒ산과 같은 사람봐라! ꡓ 해야 할 말을 너무 급하여 ꡒ산 봐라! ꡓ 하고 외쳤던 것이다. 발 아래에서 들려오는 비명소리에 두 신은 발을 멈추었는데 다시는 발을 옮길 수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여신은 남산 서쪽에 아담하게 솟아오른 부드럽고 포근한 망산(望山)
정토가 서로 융합되고 회통된 것이다. 이러한 통불교적 성격은 한국불교의 전통이 되었다. 보조국사 지눌은 교선(敎禪)일치의 종풍을 수립하고 교학과 좌선을 하나로 종합시켰다. 한국불교의 정치적, 사회적 특징은 호국불교라고 할 수 있다. 불교가 처음 전래된 것은 대략 4세기 경으로서 왕실의 귀의
○ 보원사
가야산 서북쪽에 동향하여 자리잡은 절터로 통일 신라 시대에 창건되었다고 하나, 절터에서 나온 금동불입상이 6세기 중엽에 만들어진 백제 불상으로 추정되고 있어 6세기 중엽에 창건된 것이 아닌가 한다. 더욱이 이 지역은 중국의 남조 양 나라와 활발하게 교류하던 시기에 길목 역할을 한
정하지 않은 유적일 경우 그 지역의 매장문화재 담당 기관이나 법인체에서 지역 지방자지단체에 신고하고 바로 발굴에 착수하게 됨으로써 허가에 소요되는 시간을 최소한으로 단축하고 있다. 신고를 접수한 지방자치단체는 문화청에 신고서를 제출하여 허가를 받지만 단지 요식 행위에 불과하다. 물
극락 세계등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어서 주목할 만하다. 비로전, 무설전 등은 비로자나불의 침묵을 상징한 화엄적 표현이다. 석가탑과 다보탑은 『법화경』에 토대 한 석가불의 사바 세계 불국을 그리고 안양문과 극락전은 『아미타경』에 근거한 극락 세계 정토를 각각 표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견해2)
불국사(佛國寺)와 석불사(石佛寺)는 경주 토함산의 기슭과 정상에 각각 위치하고 있어, 두 사찰 사이에는 밀접한 관계가 있을 듯하다. 실제로 현재는 흔히 석굴암이라 칭해지는 석불사가 불국사에 부속된 암자로 되어 있다.
이러한 두 사찰의 관계는 역사 전승에서도 확인된다. {삼국유사}에
석가모니나 성자의 유골을 화장한 뒤에 나오는 구슬 모양의 것을 담은 용기.
다라니경이란 탑을 조성한 다음 불경을 염송함으로써 성불한다는 뜻에서 이루어진 경전.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다라니경의 전문을 인쇄한 것으로 지금까지 알려진 인쇄본 중 세계 최고의 목판인쇄본.
3.다보탑
불국사를 창건하여 574년 진흥왕(眞興王)의 어머니인 지소부인(只召夫人)이 절을 크게 중건하면서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과 아미타불(阿彌陀佛)을 주조하게 하여 봉안하였고, 670년(문무왕 10)에는 무설전(無說殿)을 새로 지어 《화엄경(華嚴經)》을 강설(講說)하였고, 그 후 751년(경덕왕 10)에 김대성(金